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집트 신왕국 (문단 편집) ==== 쇠락과 멸망 ==== 기원전 1155년에 즉위한 [[람세스 4세]]는 [[람세스 3세]]의 둘째 아들로, 첫째 아들이었던 아멘헤르케세프가 15세의 나이로 단명했기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아멘헤르케세프가 죽자 람세스 4세는 곧바로 적법한 왕위 계승자이자 후임 파라오로 지목되었고, 아버지와 함께 국정 대다수를 함께 처리하는 등 일찍부터 국무 전반에 관여하며 경험을 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람세스 4세에게 닥친 시련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후계 문제로 왕비가 주도한 반란에 치명상을 입어 급작스레 세상을 떠났고, 람세스 4세가 반란을 일으킨 왕비를 처형하고 왕위에 오르기는 했으나 이미 파라오의 암살 시도로 왕권이 크게 흔들린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왕권 과시의 목적으로 람세스 2세 시절에 비견될 정도의 거대한 건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8400여 명에 이르는 거대한 수송대를 꾸려 나일의 채석장에서 돌을 캐오도록 명령했으며,[* 8400명에 이르는 원정대원 도중 900여 명이 넘는 수가 고된 일에 지쳐 사망했다고 한다. 사망률은 약 10.7%였으나 기록에 남지 않은 사망자들까지 합치면 이보다 더 높을 가능성이 크다.] 채석해온 돌들로 [[카르나크 신전|카르나크]]의 [[콘수]] 신전을 확장하고 장례 신전을 짓는 등 6년 반 밖에 안되는 짧은 치세 동안 꽤나 많은 건축물들을 건립했다. 람세스 4세는 기원전 1149년에 세상을 떴다.[* [[왕가의 계곡]]의 KV2 무덤에 안장되었고, 그의 미라는 현재 이집트 문명 박물관에 안치되어 있다.] 기원전 1149년에 즉위한 [[람세스 5세]] 시대 이집트에서는 파라오의 왕권이 계속 약화되고 반대로 [[아문]]의 대사제들의 권력이 강해졌다. 아문의 신관들은 신의 권위를 앞세워 국가 재정을 장악했고, 신전 소유의 땅을 크게 불려나가면서 국가의 토지 상당수를 자기 소유로 만들어버렸다. 신전 소속의 토지는 세금도 내지 않았기에 왕국의 재무 상황은 날로 나빠졌다. 당연히 신관들끼리만 해먹는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으니 수많은 부패 스캔들이 터져 기록에 남을 정도였고 외적으로는 [[리비아]]의 유목민들이 침략해 국경 지대 깊숙이까지 약탈하고 돌아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심지어 수도 멤피스와 함께 이집트의 양대 도시들 중 하나였던 테베에까지 유목민들의 위협을 받았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당시 이집트 군대가 약화되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람세스 5세는 집권 4년 만에 [[천연두]]로 사망했고,[* 람세스 5세는 역사상 알려진 가장 오래된 천연두 사망자다.] 그의 뒤를 이어 [[람세스 6세]]가 즉위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76341c05c43f3804f156d84af8ae1415-tomb-of-ramses-vi-kv-9.jpg|width=100%]]}}} || || {{{#000000 '''[[람세스 6세]]의 무덤[* 고고학계에서는 KV9 무덤이라고 부른다. 물론 약탈당해 현재는 부서진 관과 일부 부장품의 파편들만이 남아있다.]''' }}} || 람세스 6세의 8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재위 기간 동안 이집트는 끝없이 쇠락의 길을 걸었다. 람세스 6세는 본래 람세스 3세의 아들로, 람세스 3세가 죽은 이후에는 이미 적법한 왕세자인 람세스 4세의 존재 때문에 왕위를 차지하지 못했으나 이후 람세스 5세가 사망하자 드디어 왕위를 얻을 수 있었다. 람세스 6세는 즉위하자마자 테베를 방문, 자신의 딸을 아문의 대사제로 임명하고 민심을 추슬렀다. 당시 남쪽 누비아인들이 끊임없이 상이집트 일대를 침략했기에 민심이 극도로 흉흉했고 심지어는 반란의 징조까지 보였기에 더 이상 파라오마저도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람세스 6세 시대에 이르자 정부는 심지어 파라오의 무덤을 건설하는 인부들마저 통제하기 까다로운 상황에 직면했다. 인부들은 시시건건 보물을 훔치거나 탈주하려 했고, 정작 이를 관리할 책임이 있는 감독관들도 인부들과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난맥에서 람세스 6세는 즉위 초반부에 리비아의 유목민들과 누비아인들을 상대로 한 짧은 원정을 벌여 국경을 일시적으로는 안정화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람세스 3세 시절부터 빠르게 상승한 곡물 가격, 그리고 관료들의 이탈과 아문의 대사제들의 지나친 권력 때문에 이집트를 도로 원래대로 만들기는 역시 무리였다. 특히 테베를 중심으로 한 아문 신관의 지도자 람세스낙트는 국가의 재정을 틀어쥐고 파라오를 능가하는 무덤을 짓는 등 국가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쳤고, 나중에는 한 왕국 내부에 하이집트의 파라오 정부와 상이집트의 아문 신관들의 정부, 이렇게 정부가 둘로 나뉜 듯한 형국이 되었다.[* 이는 결국 테베의 신관들을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나 제20왕조를 갈아치우고 제21왕조를 건국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국외적으로도 이집트는 영토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가나안]] 지역의 마지막 영토를 잃어버렸고, [[레반트]] 일대의 소국들과 관계는 유지하고 있었으나 람세스 2세나 람세스 3세 시절만큼 그들을 상대로 패권을 휘두르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 위치하던 이집트의 요새들은 하나하나씩 함락되었고, 그나마 함락되지 않은 것들도 막대한 군비 지출과 경제 악화로 인해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집트의 국경은 [[홍해]]와 [[지중해]] 사이를 잇는 시나이 반도까지 후퇴했다. 한편 남쪽의 누비아에서도 끊임없이 불온한 움직임이 보였다. 그러나 워낙 람세스 2세 시절부터 지속된 누비아의 이집트화와 제2의 수도라고도 할 수 있을 테베가 누비아 바로 위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탓에 누비아는 의외로 생각만큼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람세스 6세는 즉위 이후 람세스 5세를 위해 예정되어 있었던 무덤을 자신의 것으로 빼앗아 더 확장하고 제 시신을 안장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투탕카멘]]의 무덤 입구가 흙에 묻혀 가려지면서 람세스 6세 사후 일어날 대대적인 왕릉 약탈을 피할 수 있었다.] 람세스 6세는 약 8년 2개월 정도 재위하다가 세상을 떴고, 이후 [[람세스 7세]]가 즉위한다. 람세스 7세는 기원전 1136년부터 기원전 1129년까지 약 8년 정도 왕좌를 지켰으나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람세스 7세의 뒤를 이은 [[람세스 8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정말 없다. 람세스 3세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제20왕조에서 손꼽힐 정도로 현대인에게 알려진 것이 없는 비운의 군주. 기원전 1119년에 파라오가 된 [[람세스 9세]]는 약 19년 동안 재위하며 제20왕조에서 람세스 3세, 람세스 11세 다음으로 오래 재위한 왕이었다. 람세스 9세의 업적에 대해서는 딱히 특기할 만한 바도 없고 실제로 별다른 행보도 펼치지 않았으나 그의 재위기에 왕권이 무너지고 사회는 붕괴하면서 상당히 많은 왕릉 도굴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지금까지 고고학자들이 찾아낸 문서들에 적혀있는 도굴범들에 대한 재판 기록만 해도 벌써 16~17건에 달하는데, 재판 기록이 소실된 것과 부정부패로 관리들에게 걸리지 않았던 것들까지 합치면 도굴 사례가 더욱 많았을 것이다. 테베의 왕릉들이 연달아 털렸고, 심지어 후대의 파라오들이 재정 부족으로 옛 파라오들의 무덤을 깨고 그 속의 보물들을 훔쳐가 사욕을 채웠다는 기록이 남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다만 이같이 파라오가 전대 파라오의 무덤을 대놓고 도굴하는 사례는 신왕국 시대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파라오 자신도 죽어 무덤에 묻힐 텐데, 함부로 남의 무덤을 도굴하기에는 명분도 실효성도 떨어졌기 때문. 그러나 신왕국이 망하고 본격적인 혼란기인 제3중간기 시대부터는 파라오고 뭐고 신나게 무덤들이 털렸다.] 람세스 9세 역시 상황이 심각함을 인지했고, 그 역시 죽어서 무덤은 도굴당하기 싫었던지 총독을 시켜 남아있는 왕릉들이라도 잘 간수하라고 명했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던 모양이다. 람세스 9세는 기원전 1111년에 사망했고, 이후 [[람세스 10세]]가 새 파라오가 되었다. 람세스 10세는 즉위 3년 만에 사망했다. 워낙 재위 기간이 짧았기에 남긴 업적도 없고 그 사이에 일어난 일들 중 기록할 만한 것도 없다. 기원전 1107년에 람세스 10세가 죽자 제20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람세스 11세]]가 왕위에 올랐다. 람세스 11세는 무려 30년 정도 재위했는데, 꽤나 길었던 람세스 11세의 통치는 안타깝게도 내내 아문 신관들의 득세와 왕권의 약화, 그리고 신왕국의 쇠퇴로 점철되었다. 어지러운 시대였기에 람세스 11세에 관해 알려진 것 역시 딱히 없다. 이쯤되자 자칭 신의 아들이라는 파라오는 이름만 거창한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실권은 모두 아문의 신관들, 그리고 쿠시의 총독 등 신하들이 갈라먹고 있는 시점이었다. 아문 대사제 피앙크는 왕의 허락을 받아내어 재위 28년에 누비아로 원정을 떠났고, 재위 29년 즈음에 다시 본거지이자 [[카르나크 신전]]이 있는 테베로 돌아왔다고 전해진다. 람세스 11세는 원인 불명의 이유로 세상을 떠났다. 워낙에 왕권이 약했기에 그는 그가 원하던 테베의 무덤에도 묻히지 못했고, 저멀리 떨어진 멤피스에 묻혔다.[* 람세스 11세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제20왕조를 끝장내고 들어선 제21왕조의 파라오들은 그의 무덤을 파내고 선대 파라오들의 부장품들을 공급할 보물 창고로 활용했으며, 고대 이집트 시대가 끝난 이후에는 [[콥트 교회]]의 은자들이 거하는 장소로 쓰이면서 파라오는 수 천년 간 안식을 찾지 못했다.] 람세스 11세가 죽자 파라오를 매장하고 장례의식을 치른 자가 새로운 파라오라는 이집트의 전통에 따라 람세스 11세의 장례를 집전한 스멘데스가 왕위에 올라 제21왕조를 열면서 500년에 걸친 이집트 신왕국이 종결을 고했다. [각주] [[분류:국가(기원전)]][[분류:고대 이집트]][[분류:성경/이스라엘 주변국]][[분류:아프리카의 제국]][[분류:전성기]][[분류:여러 대륙에 걸쳤던 국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